▣ Short Summary
이 책에서는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뭔가 채워지지 않은 듯한 현대인의 결핍과 무기력한 삶을 집중 분석하고, 냉담한 사회에서 개개인이 다시 활력과 용기를 찾고 주도적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탈출 전략을 제시한다. 이 책은 전반적으로 사람들의 두 가지 노력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하나는 삶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거기에 기꺼이 참여하려는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공동체적 목표를 자신의 사명으로 인지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보다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사명감을 가지고 무언가를 부단히 시도하는 것이다.
이 책은 우리가 무언가에 전념하는 삶, 적극적이고 당당한 삶을 살지 못하는 원인에 대해 다룬다. 왜 우리는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태도로 우리의 강점을 쟁취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의 희망, 자아상, 세계상, 인간상뿐만 아니라 개인적 경험과 사고, 결정, 행동과 행동 사이의 다양한 관계에 대해서도 자세히 다루고 있다. 즉, 자신의 삶과 다른 사람과의 공존을 쉽게 만들기도 하고 어렵게 만들 수도 있는 태도와 가치에 대해 다룬다.
우리의 자아상과 인간상, 세계상을 들여다보는 것은 우리의 경험과 행동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일 뿐만 아니라 변화와 성숙, 성공적이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기 위한 열쇠다.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자세가 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는 설득과 호소를 통해서도 드물게 나타나지만, 무엇보다도 인간 존재의 몇 가지 속성을 이해하고 인정함으로써 나타날 수 있다. 인간 속성을 이해한다면 우리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로잡을 수 있다. ‘오늘부터 이렇게 하자!’라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보다 이러한 이해는 우리의 태도를 더욱 확실하게 변화시킨다. 자신의 행동을 바꾸겠다고 결단을 내리는 일은 비교적 쉽지만, 꾸준히 실행에 옮기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 자신과 주변 사람들, 그리고 세상과 삶에 대한 믿음과 전반적인 기대 사이에는 중요한 연관성이 있다. 자기 자신과 삶에 대해 얼마나 많은 희망을 품고 있는지도 중요하다. 우리의 행동과 삶의 태도, 나아가 전반적인 인생 설계는 이런 기대와 희망에 달려 있다. 이 연관성은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 이는 한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도 해당된다.
이 책을 주의 깊게 끝까지 읽은 사람은 자신의 삶을 무관심으로 허비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이 세상이 우리의 미약하지만 중요한 기여를 기다리고, 모두를 위해 더 나은 세상이 되기를 기다린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의 이러한 기여를 절대로 거부하지 않게 될 것이다.
현재는 열린 공간이다
현재는 우리의 삶의 역사를 함께 써나가는 장소다. 물론 우리가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운명적 요인들도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는 제한성의 산물일 뿐만 아니라 결정의 산물이다. 또한 현재는 제한성에 얼마나 많은 비중을 허용할지에 따른 결정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인과적 접근의 근본적 오류는 ‘기브 앤 테이크’의 관계를 직선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인생의 페이지에 함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권리를 놓치게 하는 데 있다. 이로 말미암아 세상에 대한 우리의 기여가 요구됨에도 그에 대한 책임을 외면하게 된다.
몇 가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우리가 미움이나 사랑을 받을 때 그 순간 누군가 우리를 미워했거나 사랑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사실만으로 우리가 반드시 미워하는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경우에 무관심할 수도, 전혀 반응하지 않을 수도 있다. 또는 미움에는 친절함으로, 사랑에는 거부로 맞설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떻게 행동하든지 간에 우리가 받은 미움이나 사랑이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결정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이 결정은 우리가 과거에 미움이나 사랑을 받았다는 단순한 사실보다 우리의 정체성에 더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우리에게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결정이 우리의 모습을 만든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어떻게 행동할지를 선택할 수 없다. 더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면 운명이 우리에게 무엇을 쥐여줄지를 선택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발산할지를 결정할 수는 있다. 우리의 기여, 바로 이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이 사실을 다양한 분야와 수많은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즉,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과 우리가 세상으로 발산하는 것 사이에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선택과 자유의 순간이 존재한다. 빼앗긴 것과 선물 받은 것, 기만당한 것과 지지받은 것, 이 모든 것은 경험이다. 하지만 이 경험이 우리의 모습을 만들지 않는다. 또한 경험 자체는 어떤 행위를 하지 않는다. 인간이 반응도 하고 행동도 하는 것이다.
인간은 인과 사슬의 맨 마지막에서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존재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시작 지점에 서 있기도 하다. 그리고 자신의 결정과 행동이 가져올 모든 예측을 제쳐두고 예기치 못한 것을 세상에 내놓을 수도 있다. 또한 인간은 자신이 부정적으로 받아들인 것을 ‘정상적인 환경’에서 계속 마주칠 수도 있지만 또 다른 고통의 연쇄반응을 작동시킬 수 있는 장소에서 멈추게 할 수도 있다. 인간은 보다 성숙하고 의식적인 결정을 내림으로써 이기적인 행동으로부터 또는 영원히 지속되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은 첫걸음을 내디뎌서 좋은 것을 발산할 수 있는 존재다.
이와 관련하여 빅터 프랭클은 자신이 수용소에서 나온 직후에 쓴 희곡 『비르켄발트를 위한 레퀴엠』에서 인상 깊은 장면을 그려냈다. 배경은 비르켄발트에 있는 가상의 수용소다.
수용소 가건물에는 파울과 프란츠라는 형제가 종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형제는 이상할 정도로 활기찼고 정신도 또렷했다. 이렇게 또렷한 정신은 가망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엄청난 생명력과 인지 능력을 갖게 된 사람들한테서 종종 관찰될 수 있다. 파울은 대화를 하면서 자신이 만일 수용소에서 해방되면 무엇을 하게 될지를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린다. 그는 자신과 주변인들에게 고통을 준 사람들에게 똑같이 복수하겠다고 생각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출애굽기 21장 24절)로 되갚는다는 것이다.
반면, 프란츠의 반응은 매우 놀라웠다. “파울, 네가 성경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는 생각 안 해? 하나만 묻자. 하느님이 인류 최초의 살인자였던 카인에게 왜 ‘카인의 표적’을 찍어주었다고 생각해?”
“그야 뻔하지! 카인이 살인자라는 것을 사람들이 바로 알아보게 하려는 거지. 그를 조심하라고….”
“파울, 아니야! 카인에게 아무 일도 없게 하려고 주신 거야. 카인이 하느님한테 받은 벌 이상의 벌을 사람들이 주지 못하도록, 그리고 카인을 평온하게 내버려두기 위해서야.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한번 생각해봐. 살인이 계속 이어졌을 거야. 불의는 또 다른 불의를 낳을 뿐이지. 사람들이 계속해서 똑같은 식으로 보복 행위를 했다면 말이야. 그래서는 안 돼! 이제는 정말로 악의 사슬이 끊어져야 해! 불의에는 불의로, 증오에는 증오로, 폭력에는 폭력으로? 그렇게 갚아서는 안 돼! 파울, 이 사슬을 이제야 끊어야 해.”
여기서 사람들은 반론을 제시할 수도 있다. 즉, 프란츠의 생각이나 행동은 다분히 영웅적이고, 실제 일상에서는 심리적 모범으로 적절하지 않다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반론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 이것이 모범이 되지 않는다면 어떤 것이 모범이 될까? 역사는 일회적이라는 점을 고려해서 그러한 삶의 자세를 받아들인다면, 크고 작은 상처를 받을 때마다 더 높은 수위로 불평하거나 똑같은 행위로 보복하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다시 말해서 우리 자신이 아니면 누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 악순환을 끊을 수 있겠는가? 우리 자신이 아니면 누가 선과 치유, 사랑, 격려의 연쇄반응을 시작할 수 있겠는가?
진정한 의지와 삶의 감격
우리에게 맡겨진 일
우리가 이상과 의미 지향적인 삶의 기쁨(필요하다면 슬픔을 견디는 능력과 연민의 능력까지)을 위해 잃어버린 열쇠를 찾는 여정에서 마주치는 서로 다른 맥락의 내용들이 가진 기본 주제는 항상 동일하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떠한 사람도 외따로 떨어진 섬이 될 수 없다. 어떠한 삶도 만남 없이는 불가능하며, 어떠한 만남도 자유 없이는 불가능하며, 어떠한 자유도 책임 없이는 불가능하다. 또한 개인에게 일어나는 사건들만이 주체를 규정하고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주체는 자신의 삶에 개인적으로 기여하고, 함께 결정하고, 함께 삶을 써나간다. 이러한 개인적인 기여가 가장 먼저 나타나는 공간은 더 이상 섬이 아니라 전체(도움이 필요한 미완성의 세계)의 필연적이고 필수적인 한 부분으로 인식될 때 생겨난다.
다시 말해 우리 자신을 존재의 중심에 세우기보다 각각의 상황에서 무수한 의미 가능성에 대한 책임감을 느낄 때 진정한 치유와 각성이 나타난다. 하지만 그 또한 우리의 적극적인 도움 없이는 그저 가능성으로만 남을 뿐 실현될 수 없다. 우리의 자아가 함께 작용하지 않는 세계에서는 자아도, 자아가 행할 수 있는 것도 더욱 궁핍해진다. 우리가 바라는 선은 우리 자신에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없이는, 우리의 동의와 노력 없이는 선은 결핍 상태로 남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선을 실현시킬 수 있는 곳이 빈자리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선 자체(아름다운 경험, 성공적인 예술 작품, 타인의 친절함 등)도 아직 미완성이며 우리의 기여를 기다린다. 말하자면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정해주기를 기다린다. 결국 행복은 우리에게 인색하게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쁨의 근거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인식은 아주 단순하지만, 체념적이고 허무주의적이며 냉소적인 시대정신에 단호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말하자면 모든 무관심을 확실하게 거부하는 것이다. 또한 인간에게는 의미 없는 조역이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미완의 사실들은 다른 사람들이 대신 해줄 수 없는 각자의 기여를 기다린다. 실존적인 질문, 즉 삶에는 어떠한 대리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개인은 필요한 존재다. 그렇지 않으면 개인의 당위성이 결코 실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결론은, 삶에 있어서 정당한 무관심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은 기껏해야 무관심의 환상이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우리는 모든 상황을 경험하며, 감각적ㆍ미적ㆍ도덕적 속성을 비롯한 모든 다양한 속성 속에서 그러한 상황을 변화시키고 상상할 수 있다. 항상, 그리고 예외 없이 각각의 개인이 (의식적으로 깨어있다면) 여전히 기여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 이 가능성은 우리의 자유다. 그리고 항상 최소치의 자유만이 주어져 있는 곳, 단순한 가능성의 저편에도 우리가 직관적으로 인식한 당위가 존재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특정한 상황 속에 우리의 개인적 기여로 부여하는 것에 대한 책임이 존재한다. 이 세상에 유익한 것,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에게 맡겨진 것은 이 세상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유익하다. 이 사실은 삶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아름다운 메시지일 것이다. 가치와 의미, 선(善)과의 연결과 우리의 행복 사이에는 긴밀한 연관이 있다. 즉, 삶을 위한 동맹과 우정이 존재한다.
사람들이 지금까지 만들어놓은 것, 사람들에게 주어진 자원, 다른 사람의 약점 속에 존재하는 자신의 강점 등의 관점에서 우리가 미완의 사실들을 인지하고 호의적인 기여를 통해 내적으로 풍성해진다는 점을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온전한 인간이 되고 자신의 삶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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